저자의 작품 특성상 쉽게 읽힌 것들은 없었던 것 같다.
문장의 호흡이 단순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냥 어렵다고 할 수도 없는, 독자들에게 포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공감하게 되는 전달력 때문에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 매력으로 인해 이번 신작 출간 소식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다가왔다.
가장 좋아하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후 출간한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꾸준히 말해오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억'에 대한 물음이다.
전작인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에서 보인 역사 속 승자에 의해 다뤄진 인간의 역사는 물론이고 개인이 갖고 있던 기억에 대한 오류에 대해서 층위적인 단계를 통해 독자들에게 놀람을 선사했던 그가 이번 작품에서도 오마주 성격의 흐름들을 보인다.
'닐'이란 화자의 시선을 통해 그린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핀치가 강의한 '문화와 문명' 시간을 통해 그를 비롯한 동료들은 저마다 핀치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갖는다.
닐은 두 번의 이혼과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이란 별명이 있는 자신에게 핀치는 특별하고 독특한 생각과 강의로 인해 누구보다 그녀에 대한 추앙 비슷한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학기말 에세이 제출을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가진다.
그날을 계기로 20년간 그녀와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지내던 어느 날 약속이 취소되고 그 이후 그녀의 임종 소식과 그녀의 유언에 따른 그녀가 남긴 노트와 책들을 받는다.
그는 그녀가 지닌 것들을 처분하라는 유언은 그녀가 남긴 각 메모와 수첩, 노트를 읽게 되고 노트에서 발견된 PG의 약어에 대한 영감으로 에세이를 완성해 보려 노력한다.
이는 닐이 생각하고 있던 핀치에 대한 인생을 되짚어보고 이해하고자 했던 방편이었고 이후 에세이 내용은 로마의 마지막 이단자 황제로 알려진 율리아누스 황제의 삶을 반추한다.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넘나들며 때론 기독교와 이단교 사이에서 율리아누스에 대한 판단은 달라지며 이는 각 역사시대에 흐른 정황이나 문화와 문명 간의 연결, 문화의 파괴와 계승, 단순히 기독교도들이 주장했던 그들의 종교관을 떠나 역사에서 판결을 받는 듯한 한 인물의 모습이 핀치가 겪었던 수모와 겹치면서 오버랩된다.
저자는 작품 속에서 만일~ 이란 설정을 통해 오늘날 종교가 끼친 영향의 결과물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더라면 현재의 모습들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에 대한 물음은 물론 종교관에 대한 생각들과 함께 닐이 핀치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기존의 기억들이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는 장면은 역시 저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전 작품에서도 보인 바 있는 '기억'에 대한 오해와 타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타인은 나에 관해서 얼마 큼의 이해를 하고 있으며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하다고 느낀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우연이 개입이 된다면 그 운명은 운이나 우연에 의해 의지의 힘으론 되돌릴 수 없다는 것과 이는 닐이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핀치를 이해해보려 했던 것들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애도하는 부분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음을 느낀다.
-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소설 속 로마사를 관통하는 역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2부의 내용이 재밌게 다가왔는데 저자의 시대를 관통하는 유명한 이들이 주장하는 대목도 흥미로웠던 것은 물론이고 저자가 담은 종교관에 대한 생각들도 생각의 폭을 넓혀볼 수 있어 좋았다.
저자의 작품이 한번 읽어서는 바로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 만큼 김연수 소설가의 추천사 글인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은 뒤 중얼거린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란 문장에 많은 공감이 갔다. (다시 읽어봐야 할 소설)
작품은 타인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에 대한 충돌과정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과 이에 인간들의 믿음에 대한 맹신과 교리, 역사의 다른 상황들을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을 담아낸 소설이라 소설 속에 여러 가지 주제를 담아낸 저자의 탁월한 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 저자의 지적인 글을 즐긴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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