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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 경계 위의 방랑자

 

 

개인적으로 음악가 중에서 라흐마니노프와 말러를 생각하면 음악이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타 음악가들보다 자주 듣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이 지닌 예술적 영혼은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그들만의 고집과 혼을 담은 음악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려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번에 접한 말러에 대한 삶을 저자의 글과 함께 따라가 보는 여정이 뜻깊게 다가왔다.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인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형제들의 죽음을 일찍 접했던 말러가 지닌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과 예술적 혼을 담아 작곡한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대상으로 자녀를 많이 낳아도 죽는 자녀가 많았던 시절, 그가 보고 느낀 생각들은 자신의 정체성인 유대인이란 사실과 더불어 그가 지휘자로서, 작곡가로서 살아오는 동안 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이란 경계의 방랑자란 말이 어울린다.

 

 

그의 재능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가 1897년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발탁되면서부터 그의 철저하고도 섬세한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단원들의 해고, 여기엔 당연하게 불협화음이 겹쳐졌지만 음악 인생으로 보면 최고의 시절이었다.

 

 

그런 그가 취한 음악의 세계는 정통적인 틀에 지닌 음악적인 고양이 아닌 취객들의 권주가, 유랑 악단들의 가락들까지 작곡에 사용함으로써 기존 음악 애호가들의 반발을 샀다는 점은 지휘자로서의 명성과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상반되었다는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가 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큰 충격이었던 큰 딸의 죽음 이후 19살 차이가 나는 부인 알마의 외도는 읽는 과정에서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팜므파탈의 여성상이었고 그런 그녀의 불륜을 알고도 이혼하지 않은 채 묵묵히 모든 걸 수용한 말러의 지독한 사랑에 대한 착잡함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유대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낀 그가 가톡릭으로 개종했지만 유대교나 가톡릭교 그 어느 쪽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삶은 한 인간에게 지워진 원치 않은 굴레란 사실을 인식하지 않은,  그야말로 고독한 경계자로서의 시선으로 살아갔다는 점은 그에게 있어선 자신을 지탱하는 하나의 구심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짧고 굵게 돈을 벌어 자신이 원하는 작곡의 삶에 안주하고자 뉴욕 메트에서 지휘자로서의 생활을 이어간 말러, 그곳에서도 유럽과는 다른지만 여전히 음악의 분파를 둘러싼 지위층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가  음악가로서의 자율성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살아갔다는 점은 쉽지 않은 그의 음악에 대해 분분한 여러 지휘자들의 해석에 따라 달리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추구한 예술이 아닌가 싶다.

 

 

난해하고 경계가 없는 파격을 자신의 음악에 쏟아부은 그의 열정은 전위적이면서도 거칠고 악보 하나에 담겨 있는 연주법 자체에도 용어에 담긴 뜻을 세세히 풀어 적어놓았듯이  각인된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 열정엔 뚝심 있는 음악가란 생각이 든다.

 

 

그의 음악 외길 인생을 따라가며  읽으니 그의 고독감이 더 느껴진다.

 

 

후세의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많은 지휘자들의 손에 재탄생한 그의 음악은 아마 고인이 자신의 음악을 듣는다면 그 기분이 어떠할지, 내심 궁금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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